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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이야기

어떤 죽음이 삶에게 말했다 | 김범석

by 세상읽는토끼 2022. 8. 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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죽음에 관한 책을 찾았다. 아니, 무엇을 찾는지도 모르는 채 리디 셀렉트 에세이 부분을 뒤졌다. 그러다 눈에 띄는 책 2권, ‘어떤 죽음이 삶에게 말했다’와 ‘어느 날, 죽음이 만나자고 했다’이다. 난 아무래도 죽음에 대한 책을 찾고 있었나 보다. 특히 ‘어떤 죽음이 삶에게 말했다’는 종양내과 의사가 쓴 책이었다. 홀린 듯 읽어 내려갔다. 난 이 책에서 무슨 말을 듣고 싶었던 걸까?

종양내과라는 특성상 저자는 죽음을 많이 마주한다. 그런데 그 죽음 앞에서도 피할 수 없는 것이 돈이라고 한다. 마지막까지 돈 때문에 가족과 다투고 돈 때문에 무언가를 포기해야 한다면 그 얼마나 가슴 아픈가. 그리고 항암치료에 꽤 열정적(?)인 한국은 평균적으로 죽기 두 달 전까지도 항암치료에 매달린다고 한다. 6개월 전까지 항암치료를 하다 호스피스로 넘어가서 삶을 정리하는 외국과는 다르다. 그런데 이 과정에서 초기에 상당한 치료비를 쓰기 때문에 마지막에는 경제적 이유로 6인실을 사용하다 임종을 맞이하는 경우가 많다고 한다. 1인실을 쓴다고 존엄성을 지키며 죽는 것은 아니라지만 그래도 사랑하는 가족들에게 둘러싸여 조용히 삶을 마무리할 수 있는 것은 얼마나 소중한가. 돈이라는 것은 이처럼 아주 중요하지만 가벼이 여겨지곤 한다. 돈이 삶의 목적이 되어서는 안 되겠지만 나의 소중한 것들을 지키기 위해 돈은 아주 중요하다.

평범한 일상

영원히 살 것만 같은 일상 속에서 나이가 적든 많든 암이라는 것은 느닷없이 찾아온다. 그렇게 느닷없이 찾아온 암 앞에서, 또는 나의 마지막 생애 앞에서 의연히 살아가는 것은 쉽지 않을 것이다. 저자는 그렇게 평범한 일상을 평소처럼 살아내던 할머니를 소개하는데 새삼 그게 정말 대단한 일이구나 싶다. 내가 만약 암 선고를 받고 얼마 남지 않은 나의 삶을 마주하고도 그렇게 살 수 있을까? 너무 평범해서 특별하고 위대한 마지막이다.

항암치료 거부

한국이 항암치료를 특히 열정적으로 마지막까지 받는다지만 생각보다 항암치료를 거부하는 사람들도 많다고 한다. 이해한다. 어떤 심정일 지도 이해하고 비슷하지만 다른 이유로 항암치료를 거부하고 있기도 하다. 문제는, 이렇게 어떤 이유로든 항암치료를 거부하던 사람들의 마음이 나중에 바뀐다는 것이다. 아직 암으로 인한 고통이 시작되지 않을 때는 의연히 거부했다가 암이 진행되고 고통이 심해지면 그제야 항암치료를 해달라고 한다는 것이다. 이 때는 이미 몸이 항암치료를 견디기엔 너무 약해져 버린 뒤인데 말이다. 나는 착각을 하고 있었던 것 같다. 항암치료를 거부하면 존엄을 지키며 진통제를 좀 먹으며 편하게 죽음을 맞이할 수 있을 줄 알았다. 이처럼 괴로워하게 되는 줄 몰랐다. 고민이 되고 걱정이 된다. 나의 잘못된 결정으로 인해 많이 아파할까 봐… 사실 이 책의 꼭지 중 나에게 가장 충격적인 꼭지였다.

암에 걸리면서 마주치게 되는 어려움은 피할 수가 없고 피하면 나중에 둘, 셋이 되어 돌아온다는데 너무나 걱정이 되고 두렵다. 눈앞의 고통을 피하기 위해 항암치료를 거부하는 행위는 다시 한번 생각해달라고 의사는 말하고 있다. 하지만 우리의 결정은 눈앞의 고통 때문이 아니다. 우리 나름대로는 길게 내다보고 내린 결정이다.

현실 직시

언제나 메타인지는 중요하다. 죽음에 있어서도 마찬가지인가 보다. 현실을 직시해야 남은 삶을 어떻게 꾸려나갈지 조금이라도 후회를 덜 남길 수 있다.

기적

한 때 의사가 되고 싶었던 시절, 난 의사를 옛날 옛적 명의 정도로 생각했나 보다. 그래서 내가 과연 잘할 수 있을지 김칫국을 마시며 걱정이 많았다. 그때 남편이 그랬다. 결국 의사도 매뉴얼을 따라 하는 것이라고, 매뉴얼을 숙지 잘하면 되는 것이라고. 무언가 머리를 땡~ 하고 때리는 느낌이었다. 그렇다. 서술되어 있는 것처럼 요즘은 거의 치료 매뉴얼이 다 나와 있기 때문에 많은 환자를 보는 상황에서 0.1%의 기적을 바라며 새로운 치료를 하기보다 0.1%의 실수를 줄이는 것이 중요하다고 한다. 이제 와서 그때 그 시절 나의 김칫국이 괜스레 부끄럽다. 그럼에도 여기 나온 기적 사례처럼 의사의 판단이 중요한 순간이 꽤 있다고 생각한다. 그것이 의사의 능력인지 운인지의 판단은 하늘에 맡길 일이지만 말이다.

최선

저자는 환자가 세상을 떠나도 가족 간의 사랑을 잃지 않으면 떠나는 사람도 미련이나 후회를 남기지 않는 것처럼 보인다고 한다. 문제는 이렇게 마지막에 가족의 사랑 안에서 삶을 정리하는 사람이 많은 것은 아니라는 것에 있겠다. 아무튼 사랑하기에 최선을 다했던 마음이 남은 사람들도 앞으로 나아가게 한다고 한다. 이 말을 보고 ‘그래, 최선을 다해야지’ 하고 마음을 다잡는다. 하지만 뒤의 다른 에피소드를 읽으며 다시 한번 생각해본다. “최선을 다하는 게 과연 최선이었을까”라는 꼭지이다. 이것은 정말 깊이 잘 생각해보아야 할 문제이다. 사랑하는 데에 최선을 다하되, 의학적으로는 최선을 다하는 게 과연 최선인 상황인 건지 잘 생각해보아야겠다. 그런데 이는 사랑하는 사람의 관점으로 생각하기엔 너무나도 어려운 문제이다. 이미 결정을 내렸지만 다시 또다시 곱씹으며 아파한다.

아이의 신발

내가 한참 질질 짜던 꼭지다. 아이가 먼저 떠나면 아이의 물건을 없애는 것만이 아니라 새로 사기도 한다는 그 말이 참 기억에 남는다. 이 꼭지를 보고 우리 아가에게 새 외출복을 사주기로 마음을 먹었다. 정말 가슴 먹먹한 꼭지였다. 병원에서 신던 슬리퍼는 아이가 발 시릴까 봐 태우지 못하고 새로 사서 태워줬다는 엄마. 그 마음이 절절이 와닿는다.

오늘이 마지막인 것처럼

오늘이 마지막인 것처럼 살아가면 주변도 쉬이 어질러진 채 살기 어렵다고 한다. 내가 이대로 가버리면 나의 이 물건들은 어질러진 채로 남을 테니까. 그럼 남은 사람이 다 처리해줘야 할 테다. 이 꼭지를 읽으며 평시 나의 주변을 좀 더 신경 써야겠다는 생각을 했다.

우리는 죽음뿐만 아니라 삶도 잊어버린 채 살고 있다고 에필로그에서 밝히고 있는데, 그렇다, 아니 그랬다. 나도 그랬다. 그런데 막상 이런저런 상황에 닥치다 보니 삶이 무엇인지 생각해보게 된다. 문제는 너무 슬퍼서 그동안 호기로웠던 내 모습은 잃어버리고 지금은 삶의 의미를 찾지 못하겠다는 데에 있다.

남들이 이해할 수 없는 내 몫의 슬픔

남들이 이해할 수 없는 내 몫의 슬픔이 있는데, 타인이 그들의 잣대로 규정짓고 재단하려 할 때 그 슬픔을 견뎌야 하는 사람에게 더 큰 슬픔이 된다고 한다. 그래, 그런 류의 슬픔이 있다. 그래서 위로를 건넬 때에도 깊은 생각이 필요하다. 내가 위로하고자 건네는 말이 타인에게 더 큰 슬픔이 되어 가슴에 꽂힐 수 있다. 그래서일까, 지금 내 상황에 지인들은 할 말이 없다고만 말한다. 종교가 있는 지인들은 그저 기도하겠다고만 한다. 그만큼 참담한 일일 게다. 위로의 말조차 함부로 건네지 못하는… 함께 나눌 수 없는, 내가 견뎌내야만 하는 내 몫의 슬픔이다. 제발 여기에 더 큰 슬픔이 더해지지 않기만을 바랄 뿐이다. 지금도 충분히 견디기 너무 힘드니까. 뭐, 하늘은 지금 슬픔 제2탄을 준비 중인 것 같지만 애써 모른 척해본다. 저자는 이러한 슬픔이 영원할 것 같지만 영원하지 않다고 한다. 각자의 삶에 녹아들어 새로운 형태로 전환한다고. 하지만 과연 가능할지 모르겠다. 먼저 이 슬픔을 겪어본 이들은 불가능하다고 한다. 저자는 아버지는 잃어보았지만 내가 느끼는 이 슬픔을 겪어보지 않았다.




죽음은 삶에게 어떤 말을 할까? 일관적으로 말하기는 어려울 것이다. 여러 이야기들을 건넬 것이고 저자도 추측할 뿐이다. 자신이 마주하는 에피소드들에서 그 의미를 뽑아내 볼뿐, 죽음이 삶에게 어떤 말을 할지 그 누가 알겠는가. 매사 긍정적이다가 이처럼 시니컬하게 변해버린 내가 반갑지 않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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